그 마을 부잣집 주인의 좋지 못한 품성은 듣던 그대로였다.
탁발을 나가신 석가모니 부처께서 그 집 대문을 두들기자, 문을 열고 나온 주인은 대뜸 욕부터 해대는 것이었다.
심한 욕을 해대는 주인에게 부처께서 질문을 했다.
“누가 선물을 갖고 왔는데 주인장께서 그 선물을 받지 않으면 누구의 것입니까”
주인이 답을 했다.
“ 받지 않았으니, 선물은 갖고 온 손님의 것이 아닙니까.”
부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럼, 주인장께서 쏟아놓은 욕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인이 답을 했다.
“당신이 받지를 않았으니, 그 욕은 내 몫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깨달음을 얻은 주인은 부처를 안으로 공손하게 모시고 식사를 대접했다.
얼마 전 일, 모 행사장을 다녀 온 후 울분을 삭이지 못해하는 A 지도자를 만난 적이 있다. 행사장 연설대에 오른 B 지도자가 시민을 상대로 한 연설 내용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구미는 지금 어렵지 않습니다. 이대로 잘 간다면 구미는 분명히 제2의 도약기를 맞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충 이런 내용의 연설을 들었던가 보다.
필자는 그날, A 지도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구미에 살고 있는 절대다수는 지금 구미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그 지도자의 연설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연설 내용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시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나온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후 수선화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나르시스요, 자아도취다. 자아에 도취돼 수선화나마 되었으니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역이나 중앙의 지도자가 대중의 일반적 상황을 도외시한 채 자기만의 도취에 빠져들 경우 그 지도자는 수선화는 커녕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퇴출 될 수 밖에 없다.
이 나라 정치가 어수선하다. 공식석상에서 배신자라든가, 새끼야 라는 말이 극성을 부린다. 현자는 천하를 떠받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악자는 천하가 자신을 받들어 주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현자는 역사의 이랑 속에서 풍성한 알곡을 거둬들여 천하가 행복한 시대를 연다. 반면 악자는 역사의 이랑 속에서 어떤 수확도 할 수가 없다. 뿌린 씨앗이 없으니, 새싹을 풀어올릴 수도 없으려니와 싹이 없으니, 열매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명한 지도자가 덕치를 하려면 자신의 말을 세상이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역으로 천하의 욕을 받아들이려는 형설지공의 노력과 인내가 있어야만 한다. 그 많은 욕을 짊어진 가운데 산등성을 올랐을 때 세상은 그를 우러러보게 된다.
친박과 비박으로 갈리어 싸우는 새누리당과 친노와 비노로 패가 갈린 새정치 민주연합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이 우울하기만 하다. 국민은 없고, 공천권만 심중에 남아 있다. 권력을 맛깔나는 생선에 비유하곤 한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오는 생선을 뱉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 역시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오기 때문에 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칸트는 “반드시 줄 것을 주고, 반드시 받을 것을 받는 것”을 정의로 규정하고 있다. 정치의 중심에 정의의 물결이 넘쳐나야 한다. 국민이나 주민이 자신을 대신해서 민주정치를 해달라며, 권한을 대의했으니, 그 권한을 대의받은 지도자는 받은 만큼 댓가를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돌려주는 그 물건이 분노나 저주, 막말이어서는 안된다. 그 안에는 현실적으로 실천가능한 행복의 선물꾸러미가 담겨 있어야만 한다.
권력은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를 오인하면 독재적, 독선적 발상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 발상이 행위로 이어지면 국민으로부터 반발을 사게되며, 결국 그 지도자는 역사의 현장에서 지워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악의 역사 속에서 한페이지를 쓰게 되는 법이다.
국민은 친박, 비박이라든가 친노, 비노라는 이름을 정치인들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다.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이름을 명명했고,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위임했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자신만 괜챦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은 ‘발은 현장에 가 있으되 생각은 안방에 가 있으니’ 가능한 법이다.
중앙 정치권이나 지방 정치권이나 공히 발상의 전환을 해야만 한다. 가장 기쁠 때 가장 슬픈 국민이나 주민을 떠올려야 한다. 그래야만 만인이 행복한 세계를 열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제왕의 나라에서 왕들은 대부분 그 권력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되물림 했다. 권력의 맛은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오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요순시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자신의 권력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던 제왕의 시절에도 요임금과 순임금은 왕위를 자녀가 아닌 현자에게 물려주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국민이 행복했던 시절, 그 으뜸으로 요순시대를 역사가 규정하는 것은 권력은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행동을 통해 실천해 보였기 때문이다.
친박과 비박, 친노와 비노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의 대의 기관, 국민을 위한 정치인으로 서둘러 복귀하기를 바란다. 내가 편하기 때문에 모든 주민이 편하다는 나르시스의 정치로부터 빠져나와 주민의 정치인으로 복귀하기를 갈망하는 바이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 아니던가.
<편집인▪편집국장 김경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