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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냉산문답 “산 밖에 다시 산이 있다” VS “산 밖이나 앞이나 같다”

안정분 기자 입력 2024.07.23 15:33 수정 2024.07.25 06:59

냉산문답에 대한 해석 잘못됐다 주장 제기
1936년 이후부터 냉산문답 의미 변해

↑↑ 송당정사 앞의 신도비명(허목, 1678년)
ⓒ 경북문화신문
↑↑ 박영의 신도비명 탁본
ⓒ 경북문화신문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 송당 박영의 기획전시가 3개월째 열리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기획전과 연계해 ‘송당 박영과 송당학파’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구미시는 이처럼 기획전과 학술대회를 통해 박영의 삶과 학문, 송당학파를 재조명하고 있지만 정작 자료 해석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지역사에 관심 있는 한 원로가 ‘냉산문답’에 대한 해석이 잘못됐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냉산문답은 박영과 그의 스승 정붕이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을 탐구하여 앎에 이름)를 논한 문답으로, 신당 정붕이 제자인 박영에게 대학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박영에게 냉산을 가리키며 묻고 대답한 내용으로 유명하다.

정붕이 손을 들어 냉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밖에 무엇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송당이 “산 밖 또한 앞산이오”라고 하니 정붕이 웃으며 “이제야 책을 읽은 공이 드러남을 알았네”라고 했다는 것.

최종방(전주최씨인재공파) 선생은 이와 관련해 “송당정사 앞의 허목이 쓴 ‘신도비명’에는 박영의 답변을 ‘산 밖 또한 앞산입니다’라고 해석하고 있는 반면 ‘구미시지(구미문화원, 2000년)’와 ‘선산의 맥락(구미문화원, 1983년)’에는 ‘산 밖에는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며 “어느 쪽이 대학의 격물치지와 부합된 말인지 판단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1660년 발간된 ‘송당집’에 수록된 내용부터 1927년 발간된 ‘대동기문’까지는 송당의 답변이 ‘냉산 밖이나 앞이나 같다’는 뜻이었으나 1936년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 이후로는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산 밖에는 다시 산이 있다’는 뜻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신도비명에 있는 박영의 답변 ‘山外亦前山’ 한자를 직역하면 ‘산 밖 또한 앞산’이다. 또 ‘일선지(최현, 1618년)’ 정붕편과 ‘양현연원록(박황, 1660년)’의 일선지 초록, ‘조선명신록(이장훈, 1926년)에는 선생이 냉산을 가리키며 “저 산 밖은 어떠한가?”라고 물으니 박영이 “外面只是前面이니 彼此一耳니다(바깥면이 앞면이니 여기나 그기나 마찬가지 일 겁입니다)”라고 했다. 

반면 ‘송당집’ 시장(김재로, 1747년)에는 정붕이 “저 산 바깥에는 다시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자 박영이 “彼山外復有何物 이 산 바깥에 다시 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물건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시장(諡狀)이란 후손들이 임금에게 시호를 받을 때 써서 아뢰는 글로 과장되기도 한다. 이렇다보니 냉산문답도 잘못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 박종화는 소설 '금삼의 피'를 쓰면서 김재로가 지은 시장(諡狀)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금삼의 피'의 내용은 이후 1983년 '선산의 맥락'부터 2011년 '구미지역 세거 문중과 인물'에 이르기까지 구미지역의 거의 모든 간행물에서 냉산문답의 정설처럼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산 밖에 다시 산’은 ‘산 너머에 다시 산’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구미성리학역사관 박영 기회전시관 전시물에는 “산 너머에 다시 산이 있을 뿐이다”고 표기하고 있다.

지역의 한 문화관계자는 “구미의 역사 자료에는 잘못 표기된 것이 많다. 누군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선뜻 나서서 할 사람이 없다. 이제는 지역을 연구하는 향토사학자도 찾아보기 힘들다”며 “구미시지도 편찬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재편찬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다. 시지를 편찬할 때도 기존 자료를 그냥 갖다 붙여넣기보다는 검증 등을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송당정사(구미시 선산읍 신기리 위치)
ⓒ 경북문화신문

무인(武人)에서 문인(文人)의 삶 전환한 박영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은 무신으로 입신출세를 시작해 나중에 성리학자로, 한의학자로 일생을 다채롭게 살았다. 선산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1492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무관으로 공을 떨쳤지만, 그는 항상 학문에 대한 갈증과 학자의 삶을 갈구했다. 무과 급제 후 3년 만인 1496년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돌아와 낙동강 변에 송당정사를 짓고 학문 탐구에 몰입했다. 기초부터 다져야 했던 박영은 고향 마을에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이어가던 신당(新堂) 정붕(鄭鵬 1467~1512)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정붕은 그의 열의를 받아들였고, 박영은 자신보다 네 살 연상인 정붕을 스승으로 삼고 ‘대학’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에 힘썼다. '냉산문답'은 박영이 3년간 대학을 만독한 후 이뤄진 문답이다. 첫번째 물음에는 답 못하다가 이후 두번째 물음에 응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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