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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시니어기자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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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이 태어난 1893년부터 조선은 전통사회를 벗어나 급속하게 근대의 격랑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1876년 이루어진 부산의 개항이었다. 1876년 2월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는 부산항을 개항할 것, 앞으로 20개월 이내에 다른 두 항구를 개항할 것을 골자로 하고 있지만 일본에 대한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조선에 관세자주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으로서야 그럴 수 있다지만 국가간 무역에서 관세의 중요성마저 인식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능은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1876년 9월부터 일본 정부는 나카사키, 고토(五島), 쓰시마를 잇는 항로 개설에 5천 원의 조성금 지급을 결정함으로써 조선 도항과 무역을 장려하는 첫 활동에 돌입하였다. 이후 일본 상선은 한 달에 한 번씩 나가사키와 부산을 왕복하게 되었다. 1877년 1월에는 "부산항 일본인 거류지 조차 조약"이 체결되어 에도 시대에 설치된 왜관 부지 11만 평이 모두 일본의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가 되었다.
전관거류지란 외국 영토에서 어느 한 나라의 행정권과 경찰권 따위가 행사되는 지역을 뜻한다. 일본은 거류지에 관리관을 파견하고, 관리청을 신설했다. 관리관과 관리청은 1880년 각각 영사와 영사관으로 개칭되었다. 1877년 2월에는 근대적인 관립제생병원을 개설했다. 일본의 발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이보다 앞서 이미 일본 외무성은 1873년 10월 이 곳에 초량관어학소를 설립하고 쓰시마의 사족 소년 10명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일본 정부의 조선 정책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다카사키 소지,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역사비평사, 17~18쪽에서 인용)
일본영사관이 개설되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조선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부산에는 이들 나라의 영사관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런 관계로 1883년부터 부산에서는 성서보급을 중심으로 기독교 선교가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1884년 조선 최초의 선교사 알렌도 부산을 거쳐 조선으로 입국하였다. 그뒤 부산에는 개항 직후부터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한 흔적이 있고, 1891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월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1864~1916) 부부가 부산을 찾아들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890년 당시 부산 · 경상남도 지방에는 1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북장로교 선교부는 서울 다음으로 부산 · 경남 지방에 대한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부산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였다. 1891년 1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는 1891년 2월 3일 베어드가 공식적인 부산 선교사로 임명되자, 9월 미국영사관의 협조로 부산항에서 멀지 않은 영선현(瀛仙峴)에 선교 부지를 매입하였다. 북장로교가 매입한 이곳이 후일 초량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베어드는 초기 선교 활동을 한 서상륜과 함께 순회 전도 사업도 전개하였다. 베어드가 개척한 지역은 김해, 진주, 울산, 동래, 밀양, 대구, 상주, 경주, 안동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광주 등 전라도 지방이었다. (부산문화 대전에서 인용)
위에서 언급된 서상륜은 경실련 서경석 사무총장의 직계 선조이다.
알렌의 입국에는 일본에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부산 사람 이하영(李夏榮, 1858 ~ 1929)도 동행하고 있었다. 이하영은 개항 특수를 활용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는데, 직접 일본으로 가서 물건을 구매해서 팔자는 친구의 권유로 함께 일본에 갔다가 동업자가 자금을 들고 도망가는 바람에 실의 귀국하는 길이었다. 부산에서 이미 외국인들과의 만남에 익숙하였던 이하영은 장사꾼 특유의 친숙함으로 알렌에게 말을 걸게 되었는데, 그만 뜻밖에도 흉금이 통하게 되어 그길로 알렌의 입국길을 동행하게 되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의 통역까지 맡게 되었다. 이하영은 이로부터 승승장구하여 1887년 박정양을 대표로 하는 미국 사절단에 이완용, 월남 이상재, 칠곡 왜관 사람 이채연(李采淵, 1861~ 1900), 알렌 등과 참가하여 몇 년간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미국에서도 그는 남다른 두각을 드러냈는데, 그는 이 시기에 서양 춤을 배워서 미국의 귀족 여성들과 댄스를 즐긴 최초의 한국인으로 평가받는다. 뒷날 이하영은 외부장관에 임명되어 1905년 을사7적으로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이하영의 입신양명 이후 그의 가계는 근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군인 이종찬(李鍾贊, 1916~1983)은 바로 이하영의 손자이다. 구연수(具然壽, 1866~ 1925)도 경남 출신으로 이들은 모두 근대를 수용하여 근대인이 되었다. 이하영, 이채연, 구연수는 영남을 대표하는 초기의 근대인들이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었지만 경북은 처음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경북의 선비들과 상인들은 부산항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소식은 빠르게 낙동강을 따라 빠르게 전달되고 있었다.
1882년으로 임오군란으로 소수의 일본인들이 살해되자 이 사건의 해결책으로 8월(음력 7월)에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한성에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또 동시에 체결된 '수호조규 속약'으로 조선에서 일본인의 자유통행구역이 확장되었다. 종래 부두에서 4킬로미터 이내였던 자유통행구역이 20킬로미터로 확대된 것이다.(위의 책, 조선에 온 일본인들, 31쪽에서 인용)
오태나루와 인근의 마진나루에는 부산과 안동에서 오르내리는 배들이 즐비하였다. 주로 당시의 전매상품인 소금과 제수용으로 쓰이는 건어물, 쌀, 농기구, 생활용품을 실어나르는 배였다. 배는 상품만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부산항에서 일어나는 놀랍고 신통한 소식들도 동시에 실어날랐다.
1886년 평소 부산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던 성주의 선비, 한주 이진상은 운명 직전 아들에게 "전선이 이미 동래까지 왔다는데, 내가 살아서 무슨 낙을 누리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재산과 전장이 대부분 김해에 있었던 임은동의 김해허씨들은 수시로 김해와 동래를 드나들면서 일본의 동향을 상세히 살피고 있었다.
1893년 대구에 최초의 일본인이 등장하였다. 청일전쟁을 앞두고 개항장과 개시장이 아닌 소위 '내지'에도 법을 어긴 일본인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 대구에는 1893년 2명의 일본인이 정착하였는데, 이들은 의약과 잡화를 취급하다가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군에 고용되어 통역을 담당하였다.
1893년 대구에 정착했다가 떠났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형인 히자스키 마스키치(膝付益吉)는
1894년 대구로 이주하여 1899년 일어학교인 달성학교를 설립하고 재판소에서 통역으로 근무하였다.
1894년부터 낙동강을 통하여 근대식 제품들이 경북에도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구미지역 선비들의 문집을 보면 낙동강변 곳곳에 신식 물건들을 파는 장들이 개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쌀을 비롯한 일본에서 부족한 식량이었다.
1877년 후반기부터 1882년 전반기까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출무역 총액은 약 460만원이었다. 그 가운데 88%는 영국제 옥양목 등 면포를 중심으로 한 외국제 상품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조선의 무역을 "면미(棉米) 교환체제"라 부른다. 1894년 영국제를 누르고 일본제품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이 섬유산업의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왕산 허위 선생 년보를 보더라도 1894년부터 일본인들이 늘어났다고 되어 있다. 이 때의 일본인들은 바로 일본에서 온 군인들을 가르킨다. 청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일본군은 부산으로 다수의 공병 중심에 보병 일부가 결합된 병력을 파견하여 부산에서부터 무너진 전신주를 섬세하게 복구하면서 경북 쪽으로 북상길을 서둘렀다. 구미시에서는 해평면 해평리 전주최씨 고가에 일본군의 소수 병력이 주둔하였다. 해평리는 지금 전주최씨의 고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894년 10월 말 상주에서 패주하고 몰려온 동학 농민군들과 개령군과 선산의 농민들 수천 명이 합세하여 선산읍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기세는 3일 천하에 불과하였다. 상주 태봉에서 몰려온 채 100명도 안 되는 일본군에 밀려 몇 시간도 버티지 못 하고 동학군들은 순식간에 패배하고 말았다. 무라다 기관총과 화승총의 화력대비는 200:1이었고, 그기다가 불이 붙는데 느리기까지 하였다. 이쯤되면 전투가 아니라 인간 사냥에 해당된다. 이 놀라운 소식은 선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으로 번져갔고, 이 때부터 개화의 필요성이 선비들과 시세에 빠른 상인들, 반쪽 양반에 불과한 서자(庶子) 출신들, 부를 축적한 일부 농민들, 불평 많은 평민들 사이에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의 정보 보고에 따르면, 상주, 유곡, 선산은 동학의 소굴이라 되어 있다. 임은동의 김해허씨들도 종들의 반발 때문에 청송군 진보면으로 피난을 떠나는 지경이 될 정도로 동학은 당시의 선산군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상모동의 첫 예수교 신자인 정인백(鄭寅伯)은 스스로 위기를 느껴 서울로 도망갈 정도로 열렬한 동학 신자였다. 그런데 서울로 가는 도중에 선교사 언더우드를 만나게 되었고, 그길로 그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위암 장지연 서간집을 보니 위암 선생과 한자로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깨인 평민이었다. 그는 1906년 7월 경북의 기독교 신자들을 대표하여 서울로 가서 교회내에 세운 학교들을 지켜달라는 상소를 학부에 제출하였다.
1901년들어 김천시 아포면 송천동, 구미시 괴평동, 구미시 인동 진평리에 교회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설립되었다. 1904년부터 대구와 칠곡 김천에 이르는 경부선 공사가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05년 1월 1일 왜관 부상을 거쳐 김천 선로를 통하여 경부선 상하행 기차가 통과하게 되었다. 1905년 7월 19일 위암 장지연은 경부선 기차를 타고 일본 시찰 길에 올랐다가 9월 15일 역시 기차를 타고 귀국하였다. 1905년 3월 배일 혐의로 일본 군에 끌려간 왕산 허위 선생은 7월 19일 경부선 기차를 타고 구미시 임은동으로 귀향하였다. 1905년 개화를 받아들인 소년 창랑은 1906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길에 올랐다.
일찌기 구미시에도 근대 문물은 20세기 초부터 물밀듯이 밀려들었지만 그가 태어난 오태2동 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대구 대전 구간이 오태마을 바로 옆으로 비켜 지나갔지만 오태2동은 여전히 조용하였다. 그러나 남구미 인터체인지로 연결되는 도로가 오태2동을 앞을 바로 통과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에 들면서 창랑 장택상과 선대들이 살았던 고가(古家)는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사이에 벌써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버렸다. 2000년대 초에 화물터미널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더욱 번잡스러워지고 근대식 가옥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야은 선생 묘소와 여헌 장현광 선생의 묘소가 여전히 남아 있고 지주중류비가 우뚝이 서 있지만 성리학의 성지로 불리던 옛 자취는 많이 퇴색되어 조금은 아쉬운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그런데 이리 저리 둘러보면 울청한 수목 사이 사이로 대나무가 유독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경남의 선비 서계(西溪) 박태무(朴泰茂,1677~1756)의 문집 6권에 기록된 서계총축기(西溪䕺竹記)에 이 대나무의 유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고려가 이미 세력을 잃자 문하주서 길야은 선생께서 금오산중에 은거하셨다. 조정에서 태상박사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임금께서 현명하시어 금오산에 세금을 없이 하였다. 선생께서는 임금이 내린 땅에 대나무를 심어 뜻을 드러내었다. 그로부터 수백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곳을 바라보며 처연함에 잠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이곳은 길씨의 유허이고, 그 위에 길씨의 무덤이 있다 하였다.
지난 해 봄,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걸음에 이곳에 들러 지주중류비명을 읽었다. 오산사에 들러 선생을 배알하였는데, 과연 듣던 대로 대나무가 있었고, 뿌리 3~4개를 옮겨 심었다.
원문: 麗氏 旣衰。門下注書 吉冶隱先生 隱居 金烏山中。朝廷 召拜 爲 大常博士。辭 不至。上 賢之。命除 烏山稅。先生 種竹 於 御賜田 而以 寓志 焉。至今 數百年。過者 指點 咨嗟。相傳 爲 吉氏遺墟。其上 有 吉氏塚 云。昔年春。吾 自 洛南歸。過 砥柱中流碑 而讀 其銘。造謁 烏山祠。果有 竹 如所聞。移 其根 三四䕺 而來。
오태 마을의 마을 풍경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신비롭고 무엇인가 깊은 여운을 자아내는 듯하다. 야은 선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나무 외에도 국화가 있는데 야은국(冶隱菊)이라 부른다. 숲사이와 도로가에 군데군데 국화단지를 만들어 보자. 이왕 조경을 하는 김에 오동나무와 매화에 난초까지 심고 정성을 들여 가꾸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학들이 떼를 지어 날아들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