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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이일배의 살며 생각하며(15)]이 상처를 어찌할까

경북문화신문 기자 입력 2025.08.19 09:05 수정 2025.08.19 09:47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이일배 수필가(금오산수필문학회 자문위원)
ⓒ 경북문화신문
살다 보면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사는 일이란 상처의 극복 과정이라 할까. 그 상처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삶이 어렵거나 심지어는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요즈음 나는, 남이 알면 비소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되는 일로 칼끝이 찔러오는 듯한 아픔을 겪고 있다.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이 마을에 발을 내리고 산 지도 어언 십수 년이 지나가고 있다. 내가 마을에서 아름답게 여기는 정경 중 하나가 마을 숲 가장자리 한 곳에 다소곳이 피고 있는 상사화 꽃밭이다. 누가 오래전 몇 포기 심은 것이 점점 벌어 칠팔 월 한여름쯤에는 화사한 홍자 빛 꽃밭을 이룬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 알뿌리 화초로 이른 봄에 움이 터 5, 6월까지 난초 같은 치렁한 잎을 돋우어내다가 점점 말라 든다. 7월 말경 잎이 다 말라 땅속으로 잦아들 무렵, 촉이 나면서 비늘줄기 꽃대가 솟고 그 끝에 홍자색 꽃 몇 송이가 함초롬히 피어난다. 잎은 꽃을 그리다가 말라가고, 꽃은 잎을 그리다가 시들어간대서 상사화라 했다던가.

그 꽃이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유월 들면서 숲에 풀이 무성해지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풀베기에 나서 숲을 말끔하게 만드는데, 그날 이장은 자기 과수원에서 쓰는 네발 예초기를 몰고 나와 숲의 풀들을 무차별로 밀어버렸다. 그 ‘무차별’ 속에 꽃을 그리며 말라가고 있던 상사화 잎들도 무참히 걸려들었다. 갈기갈기 짓이겨졌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누구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다. 상사화 잎이든 뭐든 숲을 말끔히 하기 위해 쳐내고 베어내어야 할 잡풀일 뿐이었다. 나는 그 참경을 목도하고 ‘박탈당한 그리움’이라 하며 이런 글을 썼었다. “상사화가 잎이 말라가는 것은 꽃을 향한 그리움의 간절한 몸짓이 아니던가. ……그리워할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움을 무참히 박탈당한 것이다.” 그 박탈이 곧 나의 박탈로 옮아 왔다.
 
상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둑길은 아침저녁 즐겨 거니는 나의 산책길이다. 그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는 나의 듬직한 의지처고, 아늑한 위안처다. 봄이면 화사한 꽃을 피워 온 마을을 꽃동네로 만들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정량한 그늘 길을 만들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봄 못지않은 꽃길이 되게 하고, 겨울에 눈 내리면 새하얀 꽃들을 피운다. 내가 이 마을 사랑하는 으뜸가는 까닭이라 해도 좋은 모습들이다.

어느 날, 강둑에 커다란 굴착기가 오르더니 그 나뭇가지를 마구 찍어댔다. 이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굴착기를 지휘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너무 무성해 차 다니기 불편하다는 민원이 들어왔단다. 톱으로 곱게 못 다듬느냐 했더니, 그러면 일거리가 너무 많아진단다. 처참했다. 부러지고 꺾어지고 찢어지고 벗겨지고, 채 덜 부러진 가지는 꺾어진 채로 덜렁거리고…. 어쩌면 이리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장이 면사무소에 건의하고, 면에서 장비를 내주어 그렇게 했을 터이다. 면 담당자에게 항의했다. 나무를 굴착기로 짓이기는 법이 어디 있느냐, 이 참상을 나와서 한번 보시라 했다. 이장에게는 ‘당신 과수원 과목도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호소하듯 물었다. 그래도 끓는 속을 가라앉히기 어려워 동네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해 보고 싶지만, “그깟 나무 가지고 뭘 그러느냐!”라는 말밖에 들을 게 없을 것 같아 더욱 참담했다.
 
오히려 동네 사람들은 이장이 시원시원하게 일을 잘한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니 몸이 그대로 내려앉는 것 같다. 나 혼자만 왜 이러는 걸까. 면에서도 이장도, 내 뜻과 마음을 조금은 살핀 것인지, 며칠 후 꺾이고 부러진 자리를 톱으로 다듬었다. 조금 나아 보이긴 했지만, 나무와 나에게 진 상처가 쉽사리 아물 수 있지는 않았다.
 
마을 숲에 갈 때마다 상사화 꽃자리를 살핀다. 잎은 무참히 짓이겨졌을지언정 꽃대는 솟아주지 않을까. 솟을 때가 되었는데, 때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픔이 다시 솟구친다. 이 아픔을 누구에게 말한들 한마음이 되어줄 사람도 없다. 물색 모르는 사람이라 할 일밖에 없을 터다.

빌면서 기다린 끝에 지나간 해들보다 두어 주일쯤 늦게 꽃대 몇 개가 고개를 내밀었다. 반가움일지, 안타까움일지 다시 한번 마음이 아려왔다. 그 참혹한 상처 속에서, 잎 시절을 그리며 꽃대를 피워 내려 얼마나 안간힘 돋우었을까. 무지하고도 비정한 인간의 탓으로 얼마나 아린 시간을 치러내야 했을까. 이리 아픔을 이겨 내려 한 것이 고맙고도 대견스러울 뿐이다.

나는 어쩔까, 마음 깊이 새겨진 이 상처를 무엇으로 다스려야 하나. 다시 봄이 오기만 기다려야 할까. 저 처참히 찍히고 베어진 가지에서 새잎, 새 가지가 날 봄을, 저 무자비하게 짓이겨진 알뿌리가 다시 기력을 돋굴 봄날을-. 그 시간의 흐름 속에 내 상처를 맡길 수밖에 없는 무력함이 다시 상처로 새겨져 온다. 이 물색없는 상처를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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